작가: 존 르 카레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
전자책 출간: 2016.04.22
존 르 카레의 '나이트 매니저'는 BBC에서 드라마화 되어 유명해졌다. 톰 히들스턴이 프로타고니스트로, 휴 로리가 안타고니스트다. 휴 로리는 워낙 천의 얼굴이라 주연 역할을 맡았어도 잘 했을 것 같은데... 하여간 원작 이야기를 하자.
잘 알려져있다시피 존 르 카레 (본명 데이빗 존 무어 콘월)는 (아마도 체험을 바탕으로) 첩보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분인데 이 분의 저작으로 유명한 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겨울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있다. 그런데 '나이트 매니저'를 내가 인상깊게 받아들인 건 휴 로리나 톰 히들스턴 때문이 아니다. 이 작가, 존 르 카레의 인간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해 때문이다.
"난 당신 생각에 푹 빠져 있어. 당신을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가 없어.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는 뜻은 아니야. 난 당신과 같이 잠들고, 당신과 같이 잠에서 깨어나고, 양치질할 때도 당신 것까지 닦고, 대부분의 시간을 당신 생각과 싸우고 있어. 논리도 없고, 쾌감도 없이. 당신이 내뱉는 생각 중에 쓸 만한 건 단 하나도 못 들었고, 당신의 말은 대부분 가식적인 쓰레기야. 하지만 난 뭔가 재미있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당신이 웃어주어야 하고, 우울할 때는 당신이 기운을 돋워줘야 해.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 당신이 여기에 맥주를 마시러 와 있는지, 로퍼를 열렬히 사랑해서 와 있는지도 몰라. 당신 역시 모를 거라고 확신해. 당신은 엉망진창이야. 하지만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어. 전혀. 그래서 분하고, 그래서 바보가 된 기분이고, 그래서 당신 목을 졸라버리고 싶어. 하지만 이것도 집착의 일부일 뿐이겠지."
이 부분의 대사를 설명하려면 배경 설명을 해야한다. 조너선 파인은 무기 밀매업자 리처드 로퍼를 잡아내기 위해서 영국 정보국의 끄나풀이 된다. 리처드 로퍼에게는 젊고 아름다운 애인 제드가 붙어 있다. 제드의 별명은 '크리스털의 귀부인'. 얼마나 아름다운 여자인가? '나이트 매니저'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물 흐르듯 움직이는 제드의 엉덩이는 공공장소의 질서를 해치는 폭동 수준이었다.
"자연의 아이라고나 할까. 당신도 만났지. 키 큰 여자. 요정 같은."
제드가 잘 상상되지 않는다면, 배우 엘리자베스 데비키를 보면 조금은 상상이 된다. 제드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다. 악당들은 그녀의 전부를 탐낸다. 심지어 리처드 로퍼의 부하 코크란 조차도 제드더러 도망치라고 종용할 정도다. 그녀는 몸을 팔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녀를 보호해주던 아버지가 사라진 후로, 그냥 한 명의 남자로부터 또 한 명의 남자로, 데굴데굴 굴러다녔을 뿐이다. 그러다가 최악의 악당에게 걸렸던 거다.
그녀가 내릴수 있었던 결론은 오직 로퍼가 자신의 인생에서 재앙과도 같은 전환점이었다는 사실, 조너선은 평생에 걸쳐 만나왔던 그 누구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사실, 심지어 그가 자신에 대해 간파하고 있다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사실뿐이었다. 단지 자신의 장점을 믿어주기만 한다면, 그 부분들이야말로 그녀가 끌어내서 먼지를 털고 다시 사용하고 싶은 부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녀는 아버지를 되찾고 싶었다. 생각할 때마다 불량기가 꿈틀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가톨릭 신앙을 되찾고 싶었다. 발밑으로 단단한 땅을 디디고 싶었다.
조너선 파인은 정보를 캐내기 위해 제드를 이용하려고 하면서도, 제드의 매력에 속절없이 끌려든다.
그는 눈을 감고도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로마의 불가리 은제 숟가락과 그릇 안에서도, 농장을 팔고 돌아올 때마다 로퍼의 저녁 식탁에 나타나는 폴 드 라메리 은제 촛대 안에서도, 상상 속의 금박 거울 안에서도. 그는 자기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밤낮으로 그녀를 탐색하며 한심한 점을 찾아 헤맸다. 그녀에게 혐오감을 느꼈고, 그래서 더욱 그녀에게 이끌렸다. 그녀가 자신에게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벌주고 있었고, 그 권력에 굴복했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벌주고 있었다. 호텔의 창녀! 그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사람들은 널 빌리고, 돈을 내고 체크아웃을 할 뿐이야! 그러나 동시에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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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파인과 제드는 로퍼를 벗어나 조그만 농가에 자리를 잡는다. 제드는 말을 기르고 조너선은 그림을 지내며 지낸다. 해피 엔딩이라고 해야겠지. 책에서는 드라마에서처럼 통쾌하게 로퍼가 구속되는 일이 없다. 로퍼는 제드를 인질로 삼고 인질극을 벌이고, 어찌된 일인지 조너선과 제드를 풀어준다... 배 한 두척이 압류되고 몇 명 체포될 것이다. 그러나 로퍼는 건재하다. 놀라운 건 로퍼가 제드를 놓아주기 직전까지도 두 사람은 성관계를 한다. 존 르 카레가 이 장면을 얼마나 담백하고 잔인하게 기술했는지 진저리가 쳐질 정도다.
그들은 사랑을 나눈 뒤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그들이 나눈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증오에 가까웠을 것이다. 오후에 섹스를 하는 그의 오랜 습관이 최근 되살아났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에 대한 욕정은 애정도에 반비례해서 자라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과연 섹스가 사랑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좋은 섹스 상대예요." 일이 끝난 뒤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 그럼." 로퍼는 동의했다. "누구한테든 물어봐."
리처드 로퍼는 제드를 돈 주고 사온 여자로만 생각한다. 파리에서 약을 먹고 취해있던 여자. 메종 라피트의 순수혈통 종마 경매장에서 1만파운드의 옷과 순종 말을 사주고 데려온 여자. 누구하고든 잘 수 있는 여자. 누구든 제드에게 손을 대면 죽여버릴 요량이지만, 그리고 제드는 자신의 양심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석으로 꾸며서 데리고 다니고 위해 사온 여자. 그러니까, 창녀. 이게 묘하게 현대 로맨스 같은 게, 리처드 로퍼은 아폴론같은 미남이고 조너선 파인은 마음이 곧은 남자다. 조각같은 미남은 제드에게 사치의 끝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음이 곧은 남자는 원칙을 버리고 제드에게 빠져든다.
"메종 라피트의 순수혈통 종마 경매장으로 갔죠. 말들을 보고 싶었어요....(중략)...매력적인 중년 남자가 다가오더니 '어느 놈이 좋습니까?'라고 묻더군요. 난 '진열장 안의 저 큰 놈이요'라고 대답했어요...(중략)...날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 겁니다. 어디로 보낼까요?' 난 놀라서 몸이 굳어버렸어요...(중략)... 그는 샹젤리제의 가게로 날 데려갔어요. 사람이 우리밖에 없었죠. 도착하기 전에 미리 손님들을 다 내보냈던 거죠. 우리가 유일한 고객이었어요. 그는 내게 옷을 1만파운드 어치 사주고는 오페라 극장에 데려갔어요."
사실 조너선 파인도 제드를 창녀라고 생각한다. 조너선은 제드를 더러운 년이라고 부르면서도, 바로 천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너선 파인은 좀 더 미친 듯이 이 여자에게 빠져 있다. 아낌없이 돈을 쓰는 로퍼보다.
처음에 조너선은 불같이 화를 냈다. 당연했다. 그리고 조금 진정되었다. 마침내, 버가 제대로 분위기를 파악한 게 맞다면, 완전히 화가 풀렸다. 그리고 27분간 통화가 이어지다가 끝날 때 쯤에는 조너선... 조너선...조너선...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서로의 숨소리에 귀만 기울이고 있었다. 27분. 연인 사이의 진공. 로퍼의 여자 제드와 버의 부하 조너선 사이의.
여기서 나오는 버는 영국 정보부에서 조너선을 스카웃한 사람이다. 부하 조너선을 감시하다가 여자 감시팀원이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요"라고 사무적으로 통보하여 감시 테이프를 재생한다. 버는 문제가 생긴 걸 인지한다. 끄나풀이 타겟의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자신의 본명을 알려주고, 새벽에 해서는 안되는 전화를 나눌 정도로.
존 르 카레는 여자에게 빠져서 임무까지도 소홀히하며 지독하게 집착하는 남자와, 여자에게 빠져서 돈을 펑펑 쓰는 남자를 보여준다. 이게 혐관 로맨스가 아니면 뭐가 혐관 로맨스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