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구혼자들
제목: 더 도어
작가: 이래용
출판사: 애프터
이래용 작가는 '구혼자들'로 내 관심을 끌었는데 '더 도어'도 준수하다. '구혼자들' 이야기 먼저 해보자.
남자가 여러 처첩을 거느리는 하렘물이야 김만중의 '구운몽'부터 시작해서 워낙 역사가 깊고, 요즘은 역하렘물 (여자 하나에 남자 여럿이 목매는 이야기)도 많이 쏟아져 나오니 이게 왜 특이하냐 싶겠다. '구혼자들'은 전형적인 역하렘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뜯어보면 다른 역하렘물들과 다르다. 이래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주인공의 품위를 지키면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이 점이 신기하다.
줄거리: 한국에서 태어나서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죽어라 일하며 살아간 나는 과로사로 죽은 뒤 판타지 세계의 어린 과부 이블린이 된다. 5년간 열심히 노력해서 영지를 풍요하게 만들자 황제는 남편을 맞으라고 한다. 남편 후보감은 바람둥이 귀족 이안과 평민으로 시작해서 전쟁 영웅이 된 메이슨이다. 이에 이블린은 노예시장에서 사와서 면천시키고 교육을 시켜 집사를 만든 클로드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데...
그러니까 역하렘물은 여자 주인공이 문란하고, 염치없고, 욕심많고, 지조 없는 여자로 캐릭터를 만들기 쉽다. 그런데 이블린은 한국적 로판 주인공 답게 열심히 일하고, 남편이 죽은 뒤 남자들에게 한 눈 팔지도 않았고, 나름의 윤리관도 갖고 있다. 그러니까 판타지 세계로 날아는 갔지만 유교적이랄까 한국적인 가치관을 여전히 따르는 그런 캐릭터다. 한국인들은 스탯 찍는 거 좋아한다고 누가 그러던데, 스탯 찍느라고 바빠서 남자 만날 시간도 없는 건 한국에서나 판타지 세계에서나 같다. 그런데 이런 여주인공을 문란의 길로 이끄는 설정이 바로 황제의 칙령이다. 이 판타지 세계에서는 남편감 후보를 만나고 결정한다는 건 적어도 한 번은 잔다는 뜻이다 라는 설정이 있다. 따라서 좋으나 싫으나 적어도 두 명의 남자와 자야하고, 거기다가 이안, 메이슨에게 뺏길까봐 클로드는 서둘러 이블린과 관계를 갖는다.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일한 것 밖에 없는데 남자가 따라붙네 라는 설정.
답답하다면 답답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한국 독자들에게는 이 정도 설정이 좋은 것 같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면서 문란함을 상상속에서 즐길 수 있는 정도. 매운 맛도 아니고 너무 단 맛도 아닌 단짠단짠이랄까. 삶의 고단함은 판타지 세계에서도 나오니 짠 맛도 있고, 세 남자를 한 손에 쥐게 되니 단 맛도 있다. 역하렘은 배덕함 (아니 여자가 이렇게 문란하다니!)을 극복하는 게 꽤 걸림돌인데 왜 역하렘으로 가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거부감을 줄여줬다.
작가가 꽤 성실해 보인다. 세 명의 남자가 왜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지 서사를 불어넣었다. 노예로 사와서 면천시키고 교육시켜줬으니 클로드가 이블린을 사랑하는 건 당연하고, 평민으로 있을 때부터 연인관계였던 메이슨이 자신이 아닌 늙은 귀족과 결혼한 이블린에 대해 애증을 갖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게다가 그냥 귀족집안 자제인 줄 알았던 이안은 사실은 사생아였고, 이블린이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줘서 비로소 존재의 의의를 느낀다.
리디에 나온 리뷰들을 보니까 정처 역할을 하는 메이슨이 폴리가미를 주도하는데 그럴 필요가 있었냐는 지적이 있다. 타당한 지적이긴 한데 아마 요만한 분량으로 맞출려고 그랬든지, 아니면 끝에 가서 힘이 딸려서 대강 마무리했든지 그런 것 같다. 씬이 아주 야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만족한다. 특히 여주인공의 뜻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관철되어서 더 마음에 들었다.
'더 도어'는 흔한 소재를 가져다가 진지하게 썼다. 요즘 무슨 방안에 갇혔는데 제한시간 안에 뭘 안하면 죽는다는 유의 짧은 소설들이 많다. 아이돌하고 갇혔는데 30분 안에 키스 안하면 방이 좁아져서 죽는다든가 하는 이야기다. '더 도어'는 그 소재를 좀 더 확장시켜서 영리하게 썼다.
줄거리:
성실한 직장인 이유영은 욕실 문을 새로 달았다. 그런데 새로 단 욕실문을 열고 들어가자 난데없는 공간이 나타나고, 그 공간에는 검은 머리 미남 김성현과 금발 머리 미남 제이슨이 있다. 공중에 떠오른 상태창에 따르면 한 시간 안에 키스를 안하면 죽는다는데...
물론 이런 유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참가자들은 억지로 스킨십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몸정이 들게 된다 뭐 이런 이야기다. 그런데 제목을 '더 도어'로 할 거면 문을 여러개 등장시켜서,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참가자들이 만나는 걸로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면 공간이 막 뒤죽박죽이 되니까 그렇게 안한 모양인데...
전편인 '구혼자들'이 그랬다시피 '근면한 여주인공'이 나오고, 다정한 집사형 남자가 나오고, 겉으로는 강해보이지만 내면은 상처를 받은 남자가 나온다. 그리고 이유영의 숨겨진 사연과 제이슨의 숨겨진 사연이 얽히게 되면서 제이슨은 첩 노릇을 자처하게 된다. 그러니까 전편에서는 상처가 있는 메이슨이 본처였다면 이번에는 상처가 있는 제이슨이 첩이 된다. 유영이 너무나 사랑한다는 김성현은 본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경고 문구로 "본 작품은 강압적 관계 및..."이라고 달아놨지만, 글쎄 나오는 장면들은 사이좋은 커플들의 유희 수준이다. 그렇게 충격적인 장면은 없다. 충격과 공포는 봄밤 작가의 작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이다.
이 작가는 이런 플롯으로 몇 권 더 써도 될 것 같다. 서양 로판으로 한 번, 현대물로 한 번 썼으니 다음에는 동양풍으로나 캠퍼스 물로도 비슷하게 쓸 수 있으리라. 나오면 아마 불평하지 않고 구매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