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작가: 이정운
출판사: 가하
(스포일러)
2023년 2월 10일에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외전이 나왔다. 원래 이 작품은 1, 2권에서는 여주인공 유자하를 잔인하게 착취하다가 유자하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안절부절하게 되는 황제에 대해서 그리고, 3, 4권에서는 시간을 돌려 다시 이세계로 떨어진 유자하와 리카난에 대해서 설명한다. 1권은 전형적인 야설 로판인데, 갑자기 2권에서부터 '인정', '욕망'이라는 키워드가 출현하게 된다. 그리고 1, 2권과 3, 4권이 데칼코마니 같은 모습을 취한다. 1, 2권에서 여주인공이 당한 것을 3, 4권에서 동태복수법으로 갚아주는 것이다.
이정운 작가는 작품 도장깨기(작가 이름으로 나온 소설을 전부 다 사버리기)를 하기엔 적당하지 않다. 필력에서나 소재를 이끌어 나가는 게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 새 책을 내면 살 것 같다. 최근작이 될 수록 글이 정돈되어 있고 독자를 가지고 논다. 이번 외전이 바로 그런 예.
이번 외전의 촛점은 황제도, 리카난도 아닌 황태자다. 10년전으로 돌아온 황태자는 황제의 기억을 가진 귀환자가 되었다. 그는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는 인생을 제대로 살 자신이 있다. 그는 황제를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0년동안 자하를 기다리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는 미친 놈이 되어 간다. 이걸 표현하려면 꽤 끈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정운은 그걸 해낸다. 오만방자한 황태자가 겸손한 구애를 던지기까지 어떤 심리적 변화를 겪었는가를. 턱하니 던지는 게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서사를 쌓아올린다.
노예는 노예다. (중략) 한낱 노예에게 애걸복걸하는 황제라니. 그게 그의 미래였다니. 불유쾌한 농담 같았다.
애석한 일이지만, 그는 이따금 황제가 자신의 안에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지나치게 황제의 기억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한 번씩 황제 같은 사고를 하고 마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는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자신의 감정으로 착각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는 망령 못지않게 자하에게 집착했다. 좋아하진 않으나 옆에 두겠다는 미적지근한 태도는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지쳤다. (중략) 서로 다른 존재라고 필사적으로 선을 그어왔으나 망령은 사실 그다. 알면서도 아득바득 분리했던 건 망령과 그가 동일 인물이라면, 그 또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계산이 기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꾼다. 이정운은 외전에서 이걸 끈질기게 보여준다. 그리고 황태자와 유자하 사이의 저울추가 조금씩 왼쪽 오른쪽으로 흔들리며 기우는 걸 보여준다. 황태자의 일방적인 구애가 아니라는 결말이다. 외전은 유자하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거라고 암시하면서 끝난다. 보통 임신 출산 육아로 끝나는 로맨스판타지와는 달리, 행복에 대한 암시만 주고 끝내는 것도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게다가 유자하는 "...배 쪽 너무 누르지 말아요. 답답하니까."라고 말하는데, 이것 역시 이제는 남자 주인공의 아이를 가져도 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다. 자하와 산책하다가 보석을 두 개 발견해서 사이좋게 하나씩 주워서 돌아오는 태몽을 꾸는 걸로 이 작품은 끝난다. 포인트는, "사이좋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