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디키탈리스
출판사: 블라썸
출간일: 2022.03.21.
리뷰: 얀소흔이 자신만만한 남자를 그리는 데 능하다면 디키탈리스는 불쌍한 남자를 표현하는 데 능하다. 사실 디키탈리스가 창조해낸 불쌍한 남자의 최고봉은 '내 벽을 움킨 해일'의 남자 주인공 일린저 모르온. 이 못지 않게 불쌍하게 그린 남자가 '속된 자의 기도문'의 남자 주인공 야닉 언브리다. 그러고보니 '여러 해를 사는 나무여'에서 나온 요수도 있다. 디키탈리스가 표현하는 남자는, 그가 왕자이든, 귀족이든, 산신이든, 악마든, 혹은 죽음의 신이든, 여자에게 애정을 구걸한다. 이 애걸을 듣다보면 도대체 사랑을 구걸하는 게 작가인지, 남자 주인공인지, 아니면 작가가 독자들의 외로움을 대변해주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대표적으로 '속된 자의 기도문'에서 야닉 언브리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나를, 나같은 거하고 결혼해줘."
으음... 작가가 작정하고 이렇게 쓴 건지 모르겠는데...상당히 호소하는 바가 있다.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에게 혹하는 독자라면 디키탈리스 작품을 줄줄 따라가면서 읽을 만 하다. 이번 작품도 소재만 다르지 구걸하는 남자 - 용서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나는 오해를 받아도 상관없어. 나만 아니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대가 그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파..."
줄거리: 죽음의 신 악티우스는 바람의 요정 실라를 사모한다. 장난의 신 프리스토는 악티우스를 꼬드겨 일을 만들기로 한다. 프리스토가 짝사랑하는 불의 신 메르가 악티우스를 사랑하기 때문에, 악티우스를 눈앞에서 치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실라가 눈을 뜨자, 처음 보는 죽음의 땅에 자신이 악티우스의 처가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결혼식도, 사랑한 기억도 없지만 실라는 악티우스에게 정을 붙여간다. 그러나 실라의 꿈속에서 나타나는 남자는 악티우스가 아닌데...
이번 작품은 전작에 비해서 호응이 별로 안좋은 것 같다. 일단 스토리 양이 짧다. 그만큼 가격도 싸지만... 그리고 남자주인공이 충분히 불쌍하지가 않다. 빌드업이 잘 안되었다는 건데... 남자주인공이 불쌍하다고 느껴지려면 남자주인공의 고독이 느껴져야한다. 예를 들어서 세상사람들로부터 천대받는 요괴라든가, 하늘에서 떨어진 악마인데다가 천애고아라든가. 물론 지하의 왕, 죽음의 신이라는 설정에서 고독한 존재라는 설정이 약간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거갖고는 디키탈리스 표 불쌍남주 맛이 부족하다. 고독남 설정을 좀 더 밀어붙여보지...
그리고 디키탈리스의 전작에서 여자주인공들은 주로 사랑이나 권력, 재력을 베푸는 존재다. 왕족에 버금가는 귀족이거나, 퇴마사이거나, 아니면 천사이거나... 남자주인공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여자주인공이 측은지심을 발휘해 인간 (사실은 인간아닌 존재지만) 구제해주는 스토리가 이 작가의 장기다. 그런데 바람의 요정은 지위나 재력면에서 약하다. 마무리가 약하다는 평들이 있는데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한없이 불쌍한 남자를 넓은 마음으로 안아주는 여자가 이 작가의 결말이었는데... 안아주려면 눈 딱감고 안아줘야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거 아니냐 뭐 이런 평가인가보다.
p.s. 어쨌든 이 작가는 작품 제목도 잘 붙인다.